인구 1만의 도시
중세 말 바젤은 인구 약 1만 명의 도시였다. 당시 기준으로 이는 상당한 규모였다. 취리히, 베른, 루체른보다 컸고, 상라인 지역에서 스트라스부르와 경쟁하던 도시들에 견줄 만하였으나, 베네치아, 피렌체, 브뤼헤, 쾰른 같은 이탈리아, 플랑드르, 라인란트의 대상업도시들보다는 훨씬 작았다.1 14세기의 흑사병 유행과 1356년의 지진으로 감소한 인구는 15세기에 서서히 회복되었으며, 수천 명의 방문객이 도시로 몰려든 바젤 공의회 기간에는 일시적으로 정점에 이르기도 하였다.
도시의 경제는 네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었다. 첫째는 길드의 수공업 생산으로, 도시와 그 배후지에 직물, 피혁, 금속제품, 식료품, 건축자재를 공급하였다. 둘째는 교역이었다. 바젤의 시장은 쥐라에서 슈바르츠발트까지, 준트가우에서 아르가우까지 이르는 지역을 상대하였고, 이 도시의 상인들은 직물, 향신료, 포도주, 소금, 철 및 그 밖의 상품의 원거리 교역에 종사하였다. 셋째는 교회였다. 주교, 대성당 참사회, 수도원, 교구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재화와 용역을 소비하였다. 넷째는 통과 교통이었다. 다리를 건너고 라인강을 따라 이동하는 교통은 여관 주인, 운송업자, 뱃사공, 그리고 도시 자체에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15세기는 이 기둥들에 바젤의 유럽 내 위상을 변화시킬 두 개의 새로운 기둥을 더하였다. 하나는 1431년부터 1449년까지의 공의회로, 이 도시를 거의 20년 동안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1460년의 대학으로, 이 도시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제IV장과 제V장에서 이를 살펴본다. 이 장은 도시가 자신의 자금을 관리한 제도, 즉 시 재정, 조세, 공채, 세관, 그리고 시립 환전소에 집중한다.
주석
- 중세 후기 바젤의 인구 추정치는 15세기에 약 8,000명에서 12,000명 사이이다. HLS, 항목 “Basel (Gemeinde)”의 인구 부분; Kreis/von Wartburg (편), 2000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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