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의 도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에 바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종교 피난민의 물결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1542년에 재편된 로마 종교재판소가 개신교도와 이단자를 박해하던 이탈리아에서, 1562년 종교전쟁이 시작되고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수천 명의 위그노가 살해된 프랑스에서, 1567년 이후 알바 공작의 탄압과 1585년 안트베르펜 함락으로 개신교도들이 망명길에 오른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그리고 반종교개혁과 이후 30년 전쟁의 영향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서 왔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다른 목적지로 가는 길에 바젤을 거쳐 갔을 뿐이지만, 다른 이들은 머물러 시민권을 취득하고 수 세기 동안 이 도시의 경제사를 형성할 가문을 일으켰다.1
피난민들은 자본, 기술, 상업 네트워크, 그리고 새로운 산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안트베르펜, 리옹, 루카, 밀라노에서 교역하던 상인, 인쇄업자와 서적상, 견직공과 염색공, 의사와 학자가 있었다. 그들은 바젤에 견직 산업을 도입했고, 이 도시와 유럽 상업 중심지들 사이의 연결을 강화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기업가를 배출했다. 베르누이, 자라신, 바티에, 파사방, 드 바리, 베르테만 등 피난민 출신 가문들은 바젤 엘리트의 일부가 되었고, 무역, 산업 및 은행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장에서는 피난민들, 그들에 대한 도시의 정책, 그리고 그들이 일으킨 산업을 검토한다. 그 가운데 으뜸은 견직 리본 산업이다. 이 산업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바젤의 주도 산업이 되었고, 염색 수요를 통하여 제D부에서 검토하는 화학 산업을 준비했다. 이 장은 16세기와 그 뒤 수 세기의 금융 중심지를 잇는 선을 그리며 제B부를 마무리한다.
주석
- 16세기와 17세기 바젤의 종교 피난민(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에 관하여는 스위스 역사사전(HLS)의 항목 “Glaubensflüchtlinge”; Burckhardt, Geschichte der Stadt Basel, 1942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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